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정세균 유능한경제정당위원회 위원장이 정계 입문은 고 김대중 대통령이 내민 손 때문이었다. 정세균(왼쪽) 위원장이 고 김대중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 있다. /정세균 의원실 제공 |
서울 여의도 1번지 국회. 시기와 성향은 다르지만 300명의 의원이 입성했다. 통진당 해산으로 현재는 298명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큰 틀에서 소명은 같다. 민의를 대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삶과 고민은 천차만별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 어떤 꿈을 가슴에 품었을까. <더팩트>는 이들의 '국회 입성기'를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정세균(5선, 서울 종로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얼굴에선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별명도 '미스터 스마일'이다. 만면에 미소를 띠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20년 정치, 5선 국회의원이란 경력은 미소만으로 이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촌’ ‘무진장 촌놈’ 이 정 의원의 애칭이다. 여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정치하면서 붙은 애칭이지만 그의 고향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그는 1950년 9월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개안들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집안 사정은 그리 넉넉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또래의 아이들이 누리던 멱감고, 참새 잡으러 들로 산으로 쏘다니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그 대신에 소꼴을 베러 다니고, 몸에 부치는 나뭇짐을 메고 뻘뻘 땀 흘리던 고생스런 기억이 많다.”
그런 그는 고등학교를 세 곳이나 옮겨 다녔다. 무주에 있던 고등학교에서 전주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전주 신흥고등학교로 전학 갔다. 여기엔 일화가 있다.
“인문계 학교에 다니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어느 날 신흥고등학교 교장을 무턱대고 찾아갔다. 전주공고에서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정세균이라고 한다. 신흥고를 다니고 싶은데 장학금을 안 주면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 된다. 장학금을 주고 전학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누구나 힘들었던 시절 정 위원장은 초등학교 시절 사진은 단 한 장뿐이다. 누구나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정 위원장은 고등학교를 세 곳이나 옮긴 이력을 가지고 있다. / 정세균 의원실 제공 |
교장과의 담판으로 지금의 모교가 된 신흥고등학교로 전학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소원대로 1971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도 했다. 당시 그는 법관의 꿈을 가졌다. 그러나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체제가 시작되면서 꿈을 접었다.
이후 고대신문사 일에 매진하며 언론인의 꿈을 꿨다. 하지만 이 꿈도 이루지 못했다. 1974년 동아일보에 입사를 지원했지만,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를 경험하며 언론인의 꿈마저 포기했다.
유신체제에서 두 번이나 꿈을 접었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쌍용그룹 계열사인 종합상사에 입사, 미국지사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했다. 그는 이때를 선진 정치와 경제의 현장을 체득하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회상했다.
1995년까지 쌍용그룹 상무이사를 지냈던 그가 정계에 입문한 건 고 김대중 대통령이 내민 손을 잡으면서부터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은 권노갑 의원을 통해 정 고문의 정계 입문을 제안했다. 신흥 경제를 경험한 정 의원의 경력과 당시 젊은 조직을 만들려 했던 김 전 대통령의 생각이 딱 맞아떨어진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여의도 국회 첫 입성은 무난했다. 1996년 4월 11일 진안·무주·장수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나서서 상대 후보를 40%의 표차로 따돌리며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그는 진안·무주·장수에서 내리 4선을 했다. 그의 정치 입문에는 어린 시절 시대의 아픔과 면의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도 상당했다고 했다.
'슈트'하면 정세균! 정 위원장은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을 맡았다. 특히 그는 누구보다 슈트가 잘 어울리는 외모로 학창시절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는 후문이다. / 정세균 의원실 제공 |
“모두가 가난했다. 정규 중학교가 아닌 고등공민학교의 월사금을 내지 못한 아이들은 진학을 못 했다. 내 친한 친구도 그랬다. 어느 날 등굣길에 그 친구를 만났다. 이른 아침 들판으로 소를 끌고 나가던 친구는 나를 외면했다. 그때 막연하게 정치를 생각했다. 돈이 없어도 최소한의 공부는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해도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을 생각했다.
또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조상 중에 18세에 급제해 참판까지 지냈던 이야기를 자주 했다. 아마도 공직에 나가기를 기대하면서 소명의식을 심어준 것 같다. 그런 아버지의 기대도 정치를 하는데 영향을 줬다.”
정치하고부터 그의 벗들은 ‘정세균’이란 이름 앞에 ‘진촌’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진촌’은 ‘진짜 촌놈’인지 ‘진안 촌놈’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정 의원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진안에서 보내 어느 쪽도 틀리지 아니라고 했다. ‘무진장 촌놈’이라는 애칭도 ‘진촌’과 일맥상통한다.
진안·무주·장수·임실에서 내리 4선을 했던 정 의원이다. 5선도 무난했다. 하지만 그는 당 대표 시절 19대 총선 ‘호남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 대표 시절이었다. 또 그런 결정엔 그만한 이유도 있었다. 정동영 전 의원이 4·29재보선에서 수도권이 아닌 당선이 유리한 호남 지역에 출마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불평등 해소는 내 소명 정 위원장은 "불평등을 완화하고 해소하는 데 노력하고 싶다. 불평등 해소하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분수경제를 뒷받침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요즘 여기에 꽂혀있다"고 말하고 있다. / 남윤호 기자 |
이에 당시 정 대표는 "(정동영 고문의 호남 출마를) 용인한다면 수도권과 취약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당원의 사기와 당의 단합은 무너지고 정당 원칙도 무너질 것이다. 동시에 제19대 총선에서는 4선 한 지역(전북 진안·무주·장수·임실)에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정치 1번지’ 서울 종로구에 출마해 당선했다. 당시 정 의원의 상대는 6선 정치 거물 홍사덕 전 새누리당 의원이었다.
어느덧 정치생활 20년. 그동안 정책위의장 2번, 원내대표 1번, 당 대표 3번을 역임했다. 그의 정치는 아직 진행형이다. 그는 요즘 분수경제에 푹 빠져있다. 정치 목적은 불평등 해소다.
“작게는 종로구 지역에서 변화를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국민의 불평등을 해소해서 더불어 잘사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꿈을 가지고 있다. 불평등을 완화하고 해소하는 데 노력하고 싶다. 불평등 해소하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분수경제를 뒷받침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요즘 여기에 꽂혀 있다.”
정세균 의원은 1950년 9월 26일 생으로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입니다.
전라북도 진안.무주.장수.임실 선거구에서 당선되었으며, 15대 부터 16대 17대까지 의정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3선 의원입니다.
소속위원회는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이며, 홈페이지는 http://www.skchung.or.kr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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